지린성 (Jilin Sheng)
고대에 지린성 동부의 삼림지대에는 퉁구스 계의 수렵민족이 거주했고, 성 중부의 평원지대에는 예맥족이 잡거하였다. 예맥족들은 부여를 건국했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는 성 서남부의 지안을 거점으로 하여 일대 강국을 건설했다. 고구려는 기원전부터 668년까지 지린성의 거의 대부분을 통치하였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발해가 당나라를 몰아내고 698년부터 926년까지 이 지역을 통지했었다. 지린성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판도에 들어갔다. 여진족의 금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 역시 통치했었다.
청 초기에 영고탑이 지린으로 이주하면서 지린성이 설치되었다. 이 때에는 지린장군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 시기의 지린성은 동쪽으로 현재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거의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동해에 맞닿아 있었다. 한족의 이주는 엄격히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이 베이징 조약으로 1860년에 러시아로 넘어가면서부터 청조(淸朝)는 한족의 이주를 허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둥성 지역에서 건너왔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한족이 이 지역의 주된 민족그룹이 되어 있었다. 1932년에는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지린성은 그 판도에 속하게 되며 지린성의 창춘은 만주국의 수도였다. 일제가 1945년에 패망하면서 이 지역의 만주의 다른 지역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1946년 통화 사건으로 인민해방군과 독립군은 일본군 패전병을 진압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를 발판으로 하여 다른 중국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1949년의 지린성은 현재보다 훨씬 작아서 단지 창춘과 지린시 일대를 포함할 뿐이었다. 당시의 성도는 지린시(吉林市)였고, 창춘(長春)은 성으로부터 독립된 직할지역이었다. 1950년대에 지린성은 확장되어 현재의 경계를 확정한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지린성은 팽창하여 네이멍구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한때는 경계의 일부를 몽골과의 국경으로 설정하기도 하였으나 후에 복귀되었다. 현재 지린 성은 중공업에 기반한 다른 중국의 둥베이 지방과 마찬가지로, 사유화와 관련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다. 1954년 9월 27일에는 지린성 인민정부가 지린시에서 창춘시로 이전했다.
지도 - 지린성 (Jilin Sheng)
지도
나라 -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
수도는 베이징시이며, 최대 도시는 상하이시이다. 이 밖의 주요 도시로는 광저우시, 난징시, 시안시, 푸저우시, 칭다오시, 충칭시 등이 있다.
통화 / 언어
ISO | 통화 | 상징 | 유효숫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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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Y | 런민비 (Renminbi) | Â¥ or å…ƒ | 2 |